학교소개

평양숭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민족 최초의 대학

숭실학당

1897년 숭실학당 출범

1897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인 베어드(W. M. Baird,裵緯良)는 평양의 사저에서 13명의 학생을 모아 사랑방 교실을 열었다. ‘숭실학당'의 출범이었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참된 교사와 교역자 양성을 설립 목적으로 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연 숭실은 1900년에 수업연한 5년으로 하는 정식 중학교의 교과과정을
운영하였고 마침내 1904년 세 명의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이 땅에 고등교육 출범의 단초를 열었다.

설립자 배위량(베어드박사)

초창기 숭실교사

학당회학생과 한국인 교사들

제1회 숭실중학졸업생

초창기 숭실교사

제1회(중학)졸업

한국최초의 대학

숭실은 우리나라에서 4년제 정규 대학 교육의 효시

숭실은 1900년 중학교육을 본격화하여 배출한 첫 졸업생을 대상으로 1905년 가을학기부터 대학과정의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6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부가 합동으로 학교경영에 참여한 가운데 숭실에 대학과(大學科)를 설치하여 12명의 학생들을 1,2학년으로 운영하였다. 교명은 ‘Union Christian College(합성
숭실대학)'이었다. 이로써 숭실은 우리나라에서 4년제 정규 대학 교육의 효시가 되었다.

정문

농장실습

학당회학생과 한국인 교사들

학당회학생과 한국인 교사들

양주동의 영문학 강의

과학관

화학실험

민족의 대학

하나님의 뜻과 근대지향적 민족의식 속에서

숭실대학은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평양지역 주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설립되었다. 평양주민들은 대학을 설립하기 위하여 그들의 소중한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하였다. 교명의 崇實의 實은 眞實과 實業의 實이니 조선 후기의 실학 정신을 계승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서서 실업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이상을 담고 있다. 숭실대학은 이렇게 하나님의 뜻과 근대지향적 민족의식 속에서 시작된 것이다.

평양숭실 대학본관

숭실중학 뒤편 운동장에서 바라본 숭실 캠퍼스(과학관·대학 본관) _1929

항일운동의 중심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숭실대학은 국운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설립되어 국권 피탈의 아픔을 겪으면서 성장하였다. 숭실은 을사조약 반대운동, 105인 사건, 조선국민회 사건, 평양지역 3·1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주도하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맞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차이석, 손정도, 김창준, 박희도, 조만식, 배민수 등
독립운동의 주역을 배출하였다. 일제 경찰은 숭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이라 하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3.1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숭실학교 교원과 학생들

김영서

차이석

용수 쓴 모의리 교장

복음의땅 숭실

외국에까지 선교사를 파견

숭실을 통하여 관서지방은 물론 한반도 곳곳에 하나님의 복음이 퍼져 갔다. 숭실의 학생들은 남 · 북한 전도대를 조직하여 폐교하는 날까지 전도활동을 계속하였다.
숭실 학생들의 전도는 여기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학생들은 학비를 아끼고 모아 그것으로 외국에까지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일찍이 1910년 중국으로 손정도를 보냈
으며, 1911년에는 일본으로 박영일을 파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였다. 한경직, 박형룡, 강신명 등은 그 속에서 성장하여 한국 종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봉천전도대(1924졸업앨범)

남선전도대

제주전도대(1924졸업앨범)

제주전도대(1924졸업앨범)

근대문학의 선구자

숭실은 음악, 문예, 체육 및 농촌계몽 활동을 통하여 문화적 선구자의 역할

문화적 암흑기인 일제시대의 숭실은 음악, 문예, 체육 및 농촌계몽 활동을 통하여 문화적 선구자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안익태, 박태준, 현제명, 김동진 등은 숭실에서
근대음악을 접하여 이윽고 한국 서양음악의 원천이 되었으며,김현승과 김조규는 이땅의 남 · 북한 시단의 굳건한 주춧돌이 되었다. 숭실축구단이 주축이 된 평양팀과
서울팀이 대전한 경평축구전은 남북의 축구대결로 온 국민을 열광하게 하였다. 한편 숭실은 농과를 농사개량과 농업기술 발달책을 도모하며 농촌계몽운동도 전개하였다.

수영부

야구부

응원단

신사참배거부와 폐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숭실대학은 1925년 한국에 대학을 둘 수 없다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숭실전문은 1931년 3년제의 농과를 설치하여 그 규모를 확대하기도
하였으나, 일제가 황국식민화를 목표로 강요한 신사참배에 맞서 민족정기를 지키고 우상숭배를 거부하여 타협하지 않다가 끝까지 신앙적 양심을 지킨 채 1938년 결국
스스로 학교의 문을 닫음으로써 민족의 자존심과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지켜냈다.

일제 강점기 숭실대학_동아일보-19380303-1 (폐교 관련 기사)

일제 강점기 숭실대학_동아일보-19380306-1 (페교 관련 기사)

부활숭실

굴지의 종합대학교로 성장

1954년 숭실은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에서 다시 문을 열었다.
부정과 불의에 굴하지 않으며 단 한 건의 비리도 없이 깨끗한 학교 운영으로 혼돈의 시대를 헤쳐 온 숭실대학교는 개교 122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 현재 9개 단과대학과 48개 학과(부), 그리고 일반대학원을 비롯한 6개의 특수대학원을 갖춘 굴지의 종합대학교로 성장하였다.